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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재림 전 심판, 예언의 신에 관한 질문과 답변

7. 윌리엄 밀러는 참람된 사람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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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밀러는 1782년 매사추세츠 주 피츠필드(Pittsfield)에서 16명의 자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윌리엄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대위로 참전했고 그의 어머니는 침례교 설교자의 딸이었다. 윌리엄은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고작 18개월밖에 받지 않았으나 독서열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이렇게 그는 보통 이상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밀러는 이른 나이부터 글 쓰는 재능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시인이었다. 15세에 그는 개인적인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03년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오늘, 내가 말했던 날 일요일 오후, 난 내 자신을 붙들어 매어 폴트니(Poultney)의 루시 스미쓰(Lucy Smith) 양의 배우자가 되기로 서약했음이 기억되길 바란다. 본 서류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내가 그녀의 것, 오로지 그녀의 것이 될 것을 입증한다(그녀도 한 마음이라면).”(in F. D. Nichol, The Midnight Cry, 20). 그해 그들은 결혼하여, 거의 50년 후 밀러가 죽을 때까지 그들의 결혼 생활이 지속되었다.

볼테르나 토머스 페인 같은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고 밀러는 이신론자가 되어, 하나님이 세상은 창조했지만 인간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내세도 믿지 않았다. 그는 종교를 비웃고 침례교 목사였던 그의 조부와 삼촌을 조롱하기도 했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그가 결혼하던 해 이렇게 적었다. “복된 종교여, 그대 천사의 얼굴로 임하여 이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곳을 밝혀라. 내 가슴속에서 이 파괴적인 정욕을 몰아내고 내 슬픔을 잠재워 내 안식을 회복하라.”(in S. Bliss, Memoirs of William Miller, 27).

밀러는 1809년에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마침내 치안판사가 되었다. 그는 지역 사회의 존경받는 유지가 되었고,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 중위(lieutenant)로서 그의 휘하에 47명의 병사가 징집되었다. 훗날 대위(captain)이 되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불신하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 상태로 나는 내 조국을 위한 복무에 들어갔다. 나는 적어도 인간의 품성 속에서 희망의 별 같은 하나의 밝은 점을 찾아야 한다는 사상을 맘속에 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이었다.”(in Bliss, 23, 24).

1812년 전쟁의 대부분은 뉴욕의 로우 햄프턴(Low Hampton)에 있는 밀러의 집 주변 100마일(161킬로미터) 이내에서 벌어졌다. 그는 미국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3:1)였던 플래츠버그(Plattsburgh) 전투에 참전하여 영국군을 이겼다.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뜻밖의 일격으로 거둔 그런 놀라운 결과는 나에게 사람보다 더 위대한 어떤 힘의 역사처럼 보였다.”(W. Miller, Apology and Defense, 4).

전후에 밀러는 정식 교인은 아니었지만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했다. 1816년에 로우 햄프턴 지역 사회는 플래츠버그 전투 기념행사를 계획했다. 다음 일요일에 밀러는 설교를 읽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읽기 시작했으나 감정이 복받쳐 다 읽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회심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수주일 안에 “성경”은 “나의 기쁨이 되었고, 나는 예수 안에서 한 친구를 발견했다.”라고 그는 술회했다(in Bliss, 67). 1818년에 그는 다니엘 8:14과 기타 성경 본문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1843년쯤”에 재림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에 밀러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친구들과만 개인적으로 나눴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전해야겠다는 감동을 받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농부의 말을 들어 줄 것인가? 마침내 1831년 8월 토요일 아침, 그는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설교하라고 부탁한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바로 30분 후에 그의 조카가 인근의 드레스덴에 와서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가지고 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소년은 걷고 배와 말을 타고 26킬로미터를 여행해 왔다. 그는 밀러가 설교하겠다고 약속을 하기 전에 이미 거기서 출발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오래 씨름한 후에 밀러는 가기로 맘먹었다. 1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마치고 드레스덴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몬트의 폴트니에서 설교해 달라는 초청이 또 왔다. 이런 식으로 그 후 13년 동안 그는 3,200번 이상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작은 도회지들에서 설교했지만, 1839년에 프로모터이자 편집자로 일한 조슈아 V. 하임스(Joshua V. Himes)를 만난 후엔 대형 도시들에서 모여든 밀러의 청중이 수천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방에서 반대를 만났는데도, 50,000명에서 100,000명 정도가 “재림주의자”(밀러주의자)들이 되었다.
밀러의 설교는 세상의 편집자들에게도 감명을 주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의 강의에 참석하고 그 사람의 훌륭한 성품 및 그가 이뤘고 또한 지금 이루고 있는 큰 선행에 더 많이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극복했습니다. …그의 말을 5분만 들으면 어느 누구도 그의 진실성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고 그의 논리와 지식에 교훈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in Bliss, 137). 청년 엘렌 하몬이 1840년과 1842년에 두 번 밀러의 설교를 들었을 매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한 저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밀러는 “말이 침착하고 능숙하고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동안 청중의 주의를 성공적으로 사로잡는다.”(in Bliss, 149).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지 않은 두 번의 실망 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비록 내가 두 번 실망을 겪었지만 아직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적들과 조롱하는 자들로 에워싸여 있지만 내 마음은 아주 평온하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내 소망은 여전히 강하다.”(letter, Nov. 10, 1844 [in Herald of the Midnight Cry, 107]).

엘렌 화잇은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윌리엄 밀러와 제2 재림운동을 묘사하는 데 무려 다섯 장을 할애했다(317-408). 그녀는 밀러가 1842년에 매인 주 포틀랜드를 방문한 일을 회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용기 있고 동정적이었다. 장내의 모든 좌석이 만원이 되고 강단과 연단 주위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때, 그가 연단에서 통로로 내려가 노약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자리로 안내한 후 다시 돌아가서 강연을 계속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자신의 봉사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자상하게 돌보았고, 그의 몸가짐이 자애롭고 마음가짐은 온화하고 친절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 밀러”(Father Miller)라고 부르는 것이 잘 어울렸다.”(자서전, 27). 의미 있게도 그녀는 그의 봉사와 영향력을 개신교 종교개혁과 연속선상에서 보고 그를 “미국의 개혁자”라고 칭했다(각 시대의 대쟁투, 317). 그녀는 “하늘의 천사들이 그의 마음을 지도하여 그에게 성경을 열어 이해하도록 해 주었고”(위의 책, 321), 위험한 순간들에 그를 보호하기도 했다(위의 책, 337)고 말했다. 1846년 4월에 오티스 니콜스(Otis Nichols)가 엘렌 화잇의 첫 계시를 말하는 팸플릿을 밀러에게 보냈다. 니콜스는 이 팸플릿의 뒷면에 엘렌 화잇의 경험을 소개하고 밀러에게 그녀의 예언의 선물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라고 독려했다. 그러나 밀러가 보인 반응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1Bio 74-77).

밀러는 1848년에 시력을 잃었지만, 1849년 12월에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죽었다. 엘렌 화잇은 로우 햄프턴에 있는 그의 무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천사들이 이 하나님의 종의 귀중한 유해를 지키고 있으며, 그는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고 거기서 나올 것이다.”




-Paul A. Gor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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